정석도(철학박사, 남해인문예술연구소장)
빈 자리_194x130cm_패널에 아크릴릭, 바다쓰레기, 거울_2011, 2021
회화는 가장 원초적인 가상공간이다. 따라서 작가는 본질적으로 가상 세계를 붙들고 사는 비현실적 존재로서 가상 인간이기도 하다. 작가의 본분은 생전 체험하지 못한 세계의 참모습을 그려 보이는 것, 즉 현실을 넘어 이상을 작업하는 데 있다. 물론 현실을 초월한 이상의 지향이 단지 추상적인 어떤 세계의 그림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 안다. 전형적인 이상주의의 형태라는 것은 가깝게는 자기수양적 회화관에 토대를 두고 자연 사물을 인문적으로 재인식하는 동아시아 전통회화의 작업 태도 등에서 엿볼 수 있다.
우리가 몸담은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현대미술 역시 그 상품적 가치를 부정할 수는 없다. 비싼 그림이 곧 훌륭한 작품이고, 작가는 부가가치가 특별히 높은 상품생산자로서 개념화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현실이 이렇다고 해서 거기에 무조건 동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작가의 미덕은 동조와 복종에 있지 않고 독창과 줏대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일수록 우리는 다시금 미술작업의 본래 의미와 그 본질을 환기할 수 있다. 비록 고대 동아시아의 수양론적 회화관에 입각한 정도는 아닐지라도, 작가는 그림을 팔아먹는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는 사람 이라는 것, 그림은 허세와 위선으로 포장하는 상품 생산 작업이 아니라 이상을 그리는 실존의 작업임을 말이다.
김정아 작가의 작업에서는 우선 상품적 가치의 가능성보다는 시각적 사유의 계기 가 돋보인다. 타인의 시선을 과도하게 의식하는 한국 사회의 특징처럼 그림 작업마저도 타인의 시선으로 허세와 보여주기에 골몰하는 경향이 흔한 데 반해 작가의 그림은 묘사와 표현의 진솔함과 더불어 인문적 해석이 가능한 자기 본연의 시점을 견지하고 있다. 작업의 외연적 면면은 두 가지로 드러난다. 대표적으로 바다에서 수집한 플라스틱 쓰레기를 이용한 오브제 작업과 숲과 건물의 벽체 등을 소재로 한 평면 회화 작업이 그것이다.
인공파도2_365x80.3cm_패널에 아크릴릭, 바다쓰레기_2018
바닷가에 떠밀려 온 각종 플라스틱 부유물들을 이용한 작업은 의도가 뚜렷하다. 표면적으로 그것은 환경오염을 고발하고 자연 생태의 복원을 일깨운다. 작가는 온갖 종류의 플라스틱 쓰레기 천지의 바닷가를 작업의 시발점으로 삼고 있다. 바다는 본래 생명의 원천이자 종착지로서 무한 포용성을 내포한 공간적 의미로 다가온다. 그것은 생물학적 우주이자 우리가 실제로 체험할 수 있는 지상의 우주다. 그런 바다가 지금은 용도를 다한 플라스틱 공산품과 생활용품 등의 일상적인 유입에 따라 돌이킬 수 없는 상태의 바다로 변해가기에, 작가는 작가로서 할 수 있는 시각적 표현 방식을 통해 생태환경의 문제를 제기하고 경각심을 일깨우는 독자적인 회화의 형식을 마련하고 있다. 심층적으로 볼 때 플라스틱 해양쓰레기 작업에서는 역설 혹은 이중성이 드러난다. 해양쓰레기를 청소하면서 동시에 작업의 재료를 확보하게 되는 작가의 작업은 생태적 계몽의 계기와 순수하고 독창적인 창작의 계기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작품으로 재구성된 무용지물의 플라스틱 조각은 이미 무용지용의 물체로서 ‘아름다운 쓰레기’다.
작품에 깃든 계몽적 계기는 내용을 통해 직설적으로 드러나므로 굳이 많은 말이 필요 없다고 볼 때 여기서 우리가 해명해야 할 것은 아름다운 쓰레기로서 플라스틱 오브제 작업의 회화적 의미의 본질을 수반한 그 미학적 가치다. 주지하듯이 플라스틱은 자본주의의 기념비적 물질성이다. 우리가 지금 당면한 자연은 자연적 자연에 인공적 자연이 가미된 모양새다. 인공적 자연은 곧 부자연의 자연으로서 플라스틱 자연이라 말할 수 있다. 가볍고 견고하며 자유로운 성형과 복제가 장점인 플라스틱은 본래 자연 파괴를 막는 대체제의 역할을 했지만, 대량생산과 소비 외에 자기 본연의 항상성 때문에 되려 환경파괴의 근원이 된다. 자기 증식과 순환에 기초한 자연적 자연과 달리 플라스틱 자연은 원형 그대로 퇴적되고, 바다에서 부유하는 가운데 미세하게 분열됨으로써 환원 불가능한 오염을 초래한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무심한 도구로서 자기 존재의 근거가 인간에게 있는 플라스틱 쓰레기는 아무런 죄가 없다. 궁극적으로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인간의 의식이지 눈앞에 벌어진 무용한 플라스틱 형상이 아니다. 기존 인터뷰 등을 통해 우리는 작가가 무엇보다 각종 플라스틱 쓰레기의 형상과 색을 재미있게 바라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재미, 즉 색다른 조형의 가능성은 다름 아닌 쓸모없음에서 나온 것이다. 쉽게 말해 그것들은 일상에서의 실용성을 상실함으로써 비로소 예술적 쓸모를 갖게 된 사물로서 우연히 노출되고 발견된 것이다. 여기서 실용성은 곧 관계성이다. 플라스틱 물건들이 더 이상 쓸모를 갖지 못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제 용도와 의미를 담보했던 물건들이 인간으로부터 이탈된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은유적 관점에서 보면 실용성의 소멸인 쓰레기는 관계적 생명이 끝난 물체이자 자기 시간의 단절이다. 같은 관점에서, 도구는 쓸모가 없으면 죽는 것이므로, 도구적 사물로서 실용성을 다한 플라스틱 물건들은 ‘버려진 시간’ 혹은 ‘죽은 시간’이다.
인간과의 거리가 멀어짐으로써 자기 본연의 도구적 시간의 의미를 상실한 플라스틱 물건들은 본의 아니게 혹은 이제 비로소 ‘그것 자체’로서 자유롭고 독립된 사물이자 새로운 시간적 의미로서 부활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실용성과 관계성에서 멀어짐으로써 생겨난 자기 시간의 환생이다. 작가가 포착한 조형적 재미는 바로 플라스틱 쓰레기에 수반된 독립된 시간과 파도와 공기와 빛에 저항하고 동화한 시간 및 퇴색한 시간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플라스틱 오브제 작업에서 외적 재료에 내포된 조형적 가능성으로서의 재미는 또한 내적 인문적 의미를 수반한다. 시간의 풍파를 거쳐 빛바랜 플라스틱의 색감은 그 자체로 인간의 삶의 단면에 유비될 수 있는 고독과 소외와 허무 같은 감정을 일깨운다. 우리가 작가의 플라스틱 오브제 작업의 미학적 가치를 해석하고자 할 때 그 근간은 바로 거기에 내포된 시각적 재미와 인문적 의미의 토대인 ‘시간성’이다.
picturesque_81×71cm_액자, 패널에 유화, 바다쓰레기_2018
플라스틱 오브제 작업은 개념적인 방식도 있지만 대체로 바다를 그린 배경에 파도의 형상 등을 은유적으로 재현하거나 혹은 구상적 배경에 배경과 직접적인 연관성 없이 바다 쓰레기를 얹는 등, 장식성과 무관한 강한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처럼 회화적 재현을 소홀히 하지 않는 작가의 작업 방식은 오브제가 등장하지 않는 평면 회화 작업과 동떨어지지 않는 정감적 맥락을 형성하게 된다. 숲과 건물, 그 적막 가운데 간혹 등장하는 놀이공원의 플라스틱 말 등은 그 자체로 자연적 자연과 플라스틱 자연이 혼재된 우리의 현실 세계를 시제가 혼융된 비현실적 공간으로 인식하는 조형적 근거다.
밤의 숲_194×72cm_캔버스에 아크릴릭_2020
숨어있던 꽃_90x37cm_캔버스에 아크릴릭_2018
바다 작업과 병행되는 숲 그림은 사물의 존재 배경으로서 생태적 의미를 수반한 사실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전체적으로 보면 분명 관념적이다. 숲은 화면을 빈틈없이 채우는 평면적인 형태로 구성됨으로써 관념적 실재의 공간으로 자리 매겨진다. 숲속이나 건물 사이에 문득 등장하는 계단식 통로는 회화적 환영을 넘어 다른 차원의 세계로 향하는 관념의 돌파구다. 텅 빈 대지에 덩그렇게 솟아 있는 건물 형상은 마치 도화지처럼 얇게 지극히 평면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오래전에 허물어져 공간적 의미를 상실한 그리스 신전 유적지의 석조기둥같이 공간성이 무의미해지고 시간성만 남은 형국을 드러낸다. 단단한 구조물로서의 건축물의 사실성은 지극히 얇고 평면적인 표현을 통해 관념적으로 재현됨으로써 종래 영원을 꿈꾸는 일회성을 암시하고 있다. 동시에 그것은 회화적으로 환원된 시간의 질감과 차원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다.
없는 듯 있다_169x60cm_캔버스에 아크릴릭_2018
푸른 골목의 안쪽_155x95cm_캔버스에 아크릴릭_2021
숲 작업 가운데는 몇 개의 독립된 화면으로 분절된 채 재구성된 것이 있다. 그것은 자연과 그 자연을 둘러싼 사건들이 우리의 시선에서 각기 독립적으로 현상되면서도 유기적으로 통일된 세계의 다차원성을 보여준다.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숲의 표면적인 정체성으로서 공간적 차원 즉 공간성 외에 시간적 차원 즉 시간성이다. 자연의 숲은 시간의 순환에 따른 항상성을 유지하면서 현존한다. 시간적 차원은 다시 숲의 관계적 차원 혹은 이야기적 차원 즉 관계성과 사건성으로 확장된다. 다차원성을 함축한 숲은 형상 자체의 양감 공간감과 더불어 원초적 느낌과 녹음 짙은 관념적 안식처로서뿐만 아니라 또한 시간적 차원에 수반된 관점과 시제의 중요성을 부각한다. 가령, 산이 멀리서 보는 기하학적 형상성에 근거한다면, 숲은 상대적으로 가까우면서 전체를 보는 관점을 뜻한다. 나아가 멀리 보이는 형상으로서의 산이 미래지향적이고 가까이 있는 형상으로서 나무가 현재 지향적이라면, 숲은 나무의 연 대임과 동시에 나무를 초월한 전체이자 산의 구체성이라는 측면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함축한다. 분절과 재구성의 숲은 서로 연관된 숲의 모습이 차원을 달리하면서 조합된 풍경 외에 사실적인 자연을 구성하면서도 전혀 다른 시간적 차원이 개입하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작가는 우리 앞에 현시된 자연적 자연으로서의 숲이 바위같이 단단하고 속이 꽉 막힌 공간이 아니라 순환적이고 유동적이며 그 안에 이야기를 품을 수 있는 비어 있는 공간으로서 현존함을 환기한다.
보다시피 평면 회화 작업은 작가의 보다 원초적인 회화적 욕망에 근거한 작업이라는 점에서 플라스틱 오브제 작업과 그 속성이 다른 듯 하나, 조형 요소나 재료에 내포된 의미를 놓고 볼 때 두 가지 작업의 성격은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일성의 맥락 가운데서도 최종적인 것은 다름 아닌 색의 정서다. 플라스틱 오브제 작업의 전체적인 색의 정서와 평면 회화 작업의 색의 정서는 다르지 않다. 색은 곧 성격의 은유로서 조형 요소 가운데 회화의 성격을 결정짓는 것이 바로 색이라고 할 때, 색의 정서가 다르지 않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표면적 조형 방식이 달라 각기 다른 범주로 나뉠 수 있는 작업이 결국 같은 성격을 지닌다는 것을 뜻한다. 작가의 바다색은 주로 그냥 아름답고 평화로워서 누구나 보고 싶어 하는 그 넓고 파란 공간을 표현하기보다는 어부의 시선에 비친 듯한 사실적인 색을 곧이곧대로 보여준다. 그것은 숲의 색상과 채도에서 재현된다.
바다에서건 숲에서건 빈 들판에서건 작가의 평면 회화의 색감은 울트라마린과 인디언 레드 계열의 색이 돋보이는 중국 돈황 석굴의 벽화가 연상되는 색 조합으로서 얼마간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우리의 눈에 처음부터 온화하게 들어오는 인상주의적 색감과 거리가 먼 것으로서 플라스틱 바다 쓰레기의 퇴색한 색감과 관념적으로 조응한다. 플라스틱 부유 쓰레기에서 노출되는 퇴색은 바로 자연의 본 색이다. 그것은 빛과 공기와 물에 의해 기존의 허세와 위선적 치장이 벗겨지고 자연적 자연에 동화된 이후에 발하는 본디의 색이다. 색감의 조응을 통해 플라스틱 오브제의 무용하고 이질적인 시간성은 이제 동질적인 자연 본색이자 복원된 자연으로서 제 의미를 되찾는다. 색의 정서는 소외와 고독과 일회적 관계와 허무와 공허 등 작가에 의해 미적으로 환원된 인간 내면의 정감을 대변한다.
꽃보다 아름답다_63x63x10cm_한지 캐스팅에 수채_2003
시내버스 승차권 판매소_90x37cm_종이에 아크릴릭_2003
플라스틱 오브제 작업과 숲 작업 외에도 일회용 컵과 종이 접시를 성형한 것을 비롯해, 먹고 남은 과일이나 음식 쓰레기를 그리거나 캐스팅한 것, 거리의 낡은 재래식 건물 등, 사실상 작가의 전체 작업은 동일한 맥락을 유지하고 있다고 본다. 즉 그것은 플라스틱 자연과 의미가 통하는 ‘가벼움’, ‘일회성’, ‘버려짐’, ‘무용성’, ‘비어있음’에서 나아가 인문적으로 ‘소외’, ‘허무’, ‘공허 등과 유비적 소통을 통해 정서와 정감의 생태를 포함한 자연적 자연의 복원을 꿈꾸는 것이다.
꿈과 이제 오후_53x40cm_캔버스에 아크릴릭_2013
총괄적인 견지에서 볼 때 작가가 그려서 밝히고자 하는 것은 이미 중심을 차지해서 빛을 보고 있는 것들이 아니라 빛을 잃은 것들, 버려진 것들, 그늘진 곳에 존재하거나 혹은 그림자 같은 것들이다. 작가는 그렇게 소외된 시간 속에서 그 사물의 시간의 진실성을 포착해 내기 위해 직설적인 방식과 은유적 관념적 방식을 병용한다. 작가의 미감의 핵심 논리는 바로 사물은 실용성 혹은 관계성을 탈피해 소외되었을 때 비로소 아름다운 사물로서 독립자재한다는 것이다. 플라스틱 오브제 작업과 숲과 들판과 낡고 적막한 건물과 인적 없는 풍경의 평면 작업과 일상적으로 버리고 외면한 것을 향한 연민의 작업 등은 이질적이고 소외된 시간에 함축된 미적 정감에 대한 작가의 회화적 성찰이다.